독서

공지영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펄수성 2020. 12. 25. 11:17

「 하지만 청소를 하고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까. 그것이 견딜 수 없게 느껴졌던 것은 단지 그것이 그녀에게만 강요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거울 속에서 서글프게 빛나던 혜완의 눈이 점차로 무표정하고 냉랭하게 돌아왔다.

"그래, 그게 자발적인 거였다면 더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일 테지."

 

 

「 어차피와 절대로와 그래도의 차이는, 이제 마치 영점영일 도의 각도가 10년 동안 우주로 달려나가 만든 그 거리처럼 까마득하게 혜완에게는 느껴지는 것이었다. 혜완은 말하고 싶었다. 경혜야, 나 같으면 절, 대, 로, 그렇게는 안 살 텐데. 그러면 영선은 말하겠지. 그래도, 어떻게 하니? 이런 생각을 하다가 혜완은 웃어버렸다. 」

 

 

「 누군가가 불행하다는 걸 먼저 눈치채는 일은 실례라고 혜완은 믿고 있었다. 적어도 혜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그 상처를 보여줄 수 있을 때까지는, 이쪽에서 그들의 상처를 조심스레 느낄 준비가 될 때까지는. 」

 

 

「 장의 경우 그들은 결혼 서약을 했지만 지금 청바지 차림의 저 젊은 여자와도 무언가 서약까지는 아니겠지만 약속은 했을 것이다. 단지 결혼이라는 것이 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한 공공연한 약속이라는 것만으로 그렇지 않은 서약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가. 하지만 몇 달만에 서약을 뒤집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서약이 아니라 무책임한 약속이 아닐까. 그렇다면 또, 몇 달이 아니라 몇십 년 만에 서약을 뒤집으면 거기에는 타당성은 있는가. 그렇다. 그렇다 해도, 만일 서약을, 약속을 어겨야 할 일이 있다면 거기에는 무언가 목숨을 걸 만한 비장감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될 테니까. 존재 자체가 호소하는 위기도 없이 약속을 뒤집을 수 있는 게 쉽게 용납된다면 대체 우리들의 약속은 무엇인가.

 

 

「 난 한때는 글도 잘 쓰고 공부도 잘하고 꽤 칭찬도 받았던 괜찮은 여학생이었는데......

그 남자의 학비가 없으면 나는 어느덧 그 남자의 학비가 되고, 그가 배가 고프면 나는 그 남자의 밥상이 되고, 그 남자의 커피랑 재떨이가 되고, 아이들의 젖이 되고, 빨래가 되고...... 그 남자가 입을 여는 동안 나는 그런 것들이 되어 있었어. 나는 목욕탕 앞의 발닦개처럼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밟고 가도록 내버려두었어.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말야, 난 누구보다 내가 똑똑하고 현명하고 그리고 나 자신을 지키는 여자라고 누가 물었다면 맹세라도 했었을 거야. 우습지 않니?" 」

 

 

「 자유라는 게 무절제한 잠자리라고 착각하고 사는 앤데...... 」

 

 

「 선명하게 반복되는 슬로비디오처럼 혜완은 그 정황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선명해서 혜완의 머릿속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반복 상영되었건만 다른 필름들처럼 낡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

 

 

「 걷다가 돌아보니 밤이었다. 언제나 밤은 그렇게 왔다. 켜켜이 조금씩 내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커다란 솜이불을 후루룩 펼치고 그것이 내려앉듯 짧은 시간에 어둠이 거리를 덮는 것이다. 」

 

 

「 하지만 그것은 혜완의 선택이었다. 다만 그 선택 속에는 예기치 않던 상황들이 늘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가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르고 싶어 했다. 」

 

 

「 그들은 누구보다 당당하고 행복하게 생을 살아갈 자신들이 있었다. 돈이 많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리 큰 명예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만은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적으로 모욕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본보기라도 되는 듯이 지금 각자의 절망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

 

 

「 말을 이어나가면서 혜완은 문득 할머니에게 옛이야기를 듣던 시절을 떠올렸다. 할머니는 그때 혜완이 그랬던 것처럼 얌전히 이야기에 빠져들고 계셨다. 이제 너무 어른이 되어버린 손녀의 이야기를 어린아이처럼 듣고 있는 것이다. 혜완은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말을 이어나갔다. 」

 

 

「 "엄만 정완이 같은 딸 열이라도 안 부럽다. 사람의 일이란 건 알 수 없는 거다. 인생은 긴 거고, 난 누가 뭐래도 니가 자랑스럽다. 어쨌든 넌 소설가고, 예술가야. 넌 니 힘으로 살아가는 여자다. 지금은 니가 돈 때문에도 고생하고 그러지만 니 나이에 인생은 알 수 없는 거야. 그 나이때는 누구도 교만하거나 누구도 실망할 필요가 없는 거다." 」

 

 

「 "어떻게 다 달라고 하겠니? 어떻게 감히 모든 게 다 내 맘대로 이루어지길 바라겠니? 신은 모든 걸 그렇게 다 주시지는 않는다. 그래서 난 널 택했던 거다. 부디 네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아무리 어려워도 섣부른 생각 먹지 말아라......"

 

 

「 녹슨 폐선에 물결이 부딪히듯 그저 무심히, 무심히 이 어려운 시간들을 넘기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마주 앉은 선우의 눈에 비치는 저 미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움이었고 그저 마주 앉은 사람의 가슴속에 투사될 수밖에 없는 따뜻함이었다. 」

 

 

「 두려웠던 것은 선우가 아니라 그렇게 여러 이름으로 점수 매겨진 그 자리들이었다. 아니, 그 자리들 때문이 아니라 선우와는 상관없이 저질러졌던 어떤 기억들. 」

 

 

「 사랑이라니...... 말 같은 건 소용이 없었다.. 경혜를 택해버렸던, 빗속에 서 있던 학교 방송국의 그 선배도, 이혼을 하고 난 다음 혜완의 전남편도, 그리고 이미 자살을 기도한 후 영선의 남편도, 주정을 부리던 영선의 아버지도 모두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사랑한다고. 그것도 언제나 가장 나쁜 순간에 말이다.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그러므로 무의미했다. 오히려 그들은 이렇게 질문을 받았어야 했다.

 

 ―저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계세요?

 

 

「 그는 그 철로변의 노을 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그 속에서 즐거운 추억을 다시 만들어야만 해. 맑은 날로 도망치는 것도 철로변을 떠나는 것도 도움이 안 돼. 그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노을 속으로 들어가서 노을을 다시 사는 거야. 」

 

 

「 둘은 찬바람이 이는 보도로 내려섰다. 막상 마주치고 보니 찬바람도 견딜 만했다. 언제나 생각이 훨씬 더 두려운 법이다. 마주치면 오히려 담담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

 

 

「 혼자서는 비명도 별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비명이라든가 신음소리라는 건 또 하나의 언어였다. 언어는 그것을 알아듣고 그것을 이해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어루만져줄 사람이 있을 때 필요한 것이었다. 」

 

 

「 누군가와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었다면 그 누군가가 다가오기 전에 스스로 행복해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재능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면 그것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모욕을 감당할 수 없었다면 그녀 자신의 말대로 누구도 자신을 발닦개처럼 밟고 가도록 만들지 말아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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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던 결말. 현실과 너무 닮아있어서 좋기도 마음 아프기도 했던 소설. 행복해지려고 바둥칠수록 행복에서 멀어지고, 삶의 고난은 언제나 한꺼번에 몰려오고, 언제 그랬냐는 듯 또 건조하게 일상으로 돌아오는. 밀물과 썰물이 끝없이 오가지만 언제나 수평선은 잔잔하게 일렁일 뿐인 바다와 닮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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