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붉은 돼지(Porco Rosso, 1992)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

펄수성 2021. 1. 3. 04:45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마구잡이로 나옵니다.

 

<붉은 돼지>는 어쩌면 주인공의 외모 때문에, 아니면 진부하게 들리는 타이틀 때문에 몇 번이고 보려고 생각했지만 몇 년 동안이나 묵혀 두었던 영화였다. 2020년이 가기 전, 드디어 언니와 함께 앉아 볼 기회를 가졌다. 지브리 마니아들은 최고로 꼽는다는 이 영화가 도대체 어떤 영화인지. 2020년 마지막 날의 저녁을 책임져주었던 <붉은 돼지>를 짧게 감상평을 남기려고 한다.

 

영화의 배경은 푸름 그 자체였다. 하늘에서, 아니면 바다에서. 위 아래가 다 파랗게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를 주인공 포르코가 탄 빨간 비행기가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가로지른다. <붉은 돼지>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 공군으로 참전하였지만 이후 파시즘과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자유로운 인생을 선택, 그리고 저주에 걸려 돼지의 모습이 된 비행사 포르코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내가 예상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것이다. 난 여타 다른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처럼 주인공이 저주를 풀기 위해 먼 곳까지 모험을 떠나는 그런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만, 포르코는 자신이 돼지이든 사람이든 전혀 신경쓰지 않고 그의 주변인들도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인다.

 

사실 포르코가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그는 큰 감정기복을 보이는 법이 없고, 마치 세상에 흥미를 잃은 것마냥 시종일관 무뚝뚝한 태도이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엔 낭만과 사랑, 그리고 정의에 대한 철학이 깊게 자리잡고 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포르코는 무엇에도 개의치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방랑자가 되어 세상을 떠돈다. 그가 커티스에게 격추당한 후, 그를 걱정하는 지나가 앞으로는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만류하지만 그에 대한 포르코의 대답은 짧고 간결하며 견고하다.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 그의 옛 전우가 다시 공군으로 들어오라고 권유할 때도 그는 단호했다.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로 사는 편이 나아."

 

작중 포르코는 가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피오와 함께 아지트에 돌아온 후 잠에 들락말락하던 피오가 언뜻 탄약을 정비하던 그를 볼 때, 그리고 엔딩 직전 피오에게 키스 받았을 때. 그리고 피오가 잠이 오지 않는다며 그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자 그는 키다리 아저씨마냥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다. 이게 따뜻할 때 따뜻할 줄 아는 로맨시스트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리고 그가 해 준 이야기는 포르코가 아직 공군 마르코이던 시절, 적에게 피습당해 동료를 모두 잃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던 경험담이었다. 토성의 궤도처럼 반짝거리던 별무리들. 그건 이미 포르코를 두고 먼저 떠난 동료들의 비행기가 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것이었다. 어쩌면 탄약을 만지작거리던 포르코가 사람으로 돌아왔던 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가 그랬듯이 자신과 현실의 무거운 한계를 잊을 때, 그리고 자기혐오에서 잠깐 멀어졌을 때가 아닐까 싶다. 포르코에게 저주를 건 인물이 따로 없다는 것, 혹은 저주의 비밀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포르코 스스로가 그런 저주를 만들어냈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좋은 녀석은 모두 죽지. 그 말을 한 포르코 자신도 역시 좋은 놈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적어도 포르코 스스로는 자신에게 비겁한 놈이라고 평가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포르코도 엔딩 씬에서 작별 키스를 받고 인간으로 돌아오거나 낮에 지나에게 찾아간 것을 보면 그 무심하던 포르코에게도 변화가 있었나보다. 포르코가 조금은 덜 염세적인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길. 인간이길 체념하지 않길.

 

연인은 없지만 자신의 비행기에게 엔진짱이라고까지 불러가며 부드럽게 불러주는 포르코. 영화 내내 피오에게 무뚝뚝하지만 못이긴다는 듯 피오 뜻대로 다 해주고, 피오의 키스에 얼굴이 빨개지는 포르코는 개성이 뚜렷하고 매력이 확실한 캐릭터이다. 이렇게 하드보일드하면서도 귀여운 구석이 있는 주인공은 없었다. 이 영화가 대책없이 따뜻하고 밝게 느껴지는 것은 주인공과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낭만을 품고 살아가는 듯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피오에게 헐리우드에서 안부 편지를 보내는 커티스도. 햇빛이 들어오는 비밀 정원에서 포르코와의 내기를 기다리던 지나도. 익살맞은 맘마유토단과 당찬 피오 모두도.